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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항수송정 2척 진수 상부 보고… 민간공장 생산·인력까지 챙겼다 [인천조병창 아카이브, 빈칸을 채우다·(2-2)]
경인일보·모씨네사회적협동조합 공동기획
조병창·조선기계제작소 잠수함 공동사업
일본 육군 명령으로 3식잠항수송정 건조
병기·탄약 수량과 갑판 배치까지 기록
민간 군수공장 실적표 올리며 관리·감독
종전 직전까지 조선인 강제동원 깊숙이 관여

1945년 10월 11일 미 해군 앤티텀(U.S.S Antietam)호 소속 장교들이 조선기계제작소에서 건조한 잠수정을 조사하고 있다.(RG 80-G, Box 1312, 미국 NARA) /모씨네 디지털아카이브 제공
1945년 9월3일 오전 9시 36분, 미 해군 함재항공단은 항공기 95대를 동원해 목포, 전주, 군산, 경성·인천 지역 상공에서 무력시위를 벌였다. 9월8일 오전 11시, 미 해군 항공국 소속 커티스 SB2C 헬다이버의 선임 조종사 조지 M. 커티스 주니어(George M. Curtis Jr.) 해군 대위는 미 제7상륙부대의 상륙작전을 항공 지원하던 중 화수동 조선기계제작소 상공에서 독에 정박한 잠수정을 발견하고 카메라 셔터를 눌렀다. 이 사진에 담긴 두 곳의 독 가운데 한 곳에 있는 잠수정 4척은 ‘3식 잠항 수송정’, 이른바 ‘마루유’라 불린 수송용 잠수함이다. 인천육군조병창과 조선기계제작소가 어떤 관련이 있는지 추적해 보자. 아시아·태평양전쟁 막바지에 인천조병창은 부평뿐 아니라 인천항 일대 군수업체와 동쪽 영종도, 동남쪽 송도 고사포 진지까지 폭넓은 관할권을 유지하고 있었다.
■ 인천항 군수공장들, 전시 협력에 나서다

1941년 5월 ‘조선시찰보고서(朝鮮視察報告書)’. 표지에는 작성자가 육군성 ‘정비국 정비과 곤도 소좌’로 적혀 있으나, 1941년 육군성 직원록에는 곤도가 중좌로 올라 있으며 정비과에서 해외 군수물자 통제를 담당하고 있었다. 이 책의 목차를 보면 제1장 ‘경인지구’에 1. 용산공작주식회사, 2. 조선기계, 3. 조선광업, 4. 조선이연 인천공장, 5. 일본차량 인천공장, 6. 인천육군조병창, 7. 디젤자동차 조선제조소, 8. 인천항 등이 실려 있다. 이 자료에서 중요한 지점은 인천항의 조선기계와 일본차량 인천공장, 부평의 디젤자동차 조선제조소가 실제로 인천육군조병창의 통제를 받고 있었다는 사실이다.(일본 방위성 방위연구소, 滿洲-朝鮮, 379) /모씨네 디지털아카이브 제공
1941년 5월8일부터 14일까지 조선군이 주최한 ‘대륙국방자원 군연락회의’에 참석한 곤도 고헤이(近藤幸平·1941년 육군성 직원록에는 중좌로 표기)는 일본 육군성 정비국 전비과(戰備課) 소속으로 해외 군수물자와 동원 통제를 담당한 인물이었다. 이 회의에서는 일제의 대륙 침략을 뒷받침할 군수 자원으로서 인천을 비롯해 용산, 흥남, 성진, 평양, 압록강 일대의 산업·전력 시설과 군수업체, 주요 항구 등이 상세히 논의되었고, 그 내용을 곤도가 정리한 것이 ‘조선시찰보고서(朝鮮視察報告書)’다. 책자 2~3쪽에는 조선기계와 인천조병창이 간략히 소개되어 있다.
“5월5일에 개창식을 치른 참이어서, 현재 완공된 것은 총검 공장과 견습공 훈련용 공장뿐이다. 지난해(1940년) 초여름의 진척 상황에 비추어 보면 건설 속도가 다소 더디다는 인상을 주지만, 방공 설비만큼은 근대적 공장의 면모를 지니고 있다.”
이처럼 인천조병창은 두 곳의 공장만 완공한 채 계속 공장을 신축하고 있었다. 이보다 앞서 설립된 조선기계제작소는 같은 책자에서 1940년 “조선 내 제일의 광산용 기계 제작 공장”으로 평가되었으나, 실상은 “전기로와 압연 공장 등을 증설하는” 정도였다. 그러다 태평양전쟁 직후 인천항과 부평 일대 공장들이 군수업체로 지정될 때, 조선기계제작소도 1942년 2월과 1943년 5월 두 차례 임시주주총회에서 임원을 교체하고 해군의 선박 엔진 제작에 나섰다. 200마력 40대와 380마력 25대로, 시가 340만 원어치였다. 곤도의 서술만 놓고 보면 인천조병창과 조선기계제작소 사이에는 아무런 접점이 없어 보인다.
美·英 정보기관, 신형 잠수정 건조 이미 파악
조선 항공기 조립공장 3곳 중 부평 포함
문서엔 7척 기록됐지만 실제 건조는 4척
잠수수송교육대, 조선서 2척 수령 후 귀환
■ 육군, 잠수정을 만든 까닭
잠수정은 본래 해군이 쓰는 배다. 그런데 이 잠수정을 발주한 주체는 육군이었다. 남태평양 일대 섬에 흩어진 부대로 가는 뱃길이 끊기자, 일본 육군은 스스로 물을 건널 수단을 갖추기로 한다. 육군 제10기술연구소가 기존 잠수정을 개조해 만든 ‘3식잠항수송정’, 이른바 ‘마루유’는 무기가 아니라 식량 운반에 목적을 둔 배였다. 육군 기술연구소의 병기 장교 두 사람이 1943년 1월까지 완성한 도면은 병력 2만명의 하루치 식량, 곧 백미 24t을 실어 나르는 잠수정이었다. 수상 배수량 275t에 수중 346t, 길이 40m 남짓에 너비 4m 안팎이고, 속력은 수상에서 9.6노트, 물속에서 4노트였다. 안전 잠항 깊이는 100m, 승선 인원은 25명이었다. 1943년 4월 히타치제작소 가사도 공장과 안도철공소에서 건조가 시작돼 10월29일 진수했고, 이틀 뒤 육군이 인수해 제1호정이라 이름을 붙였다.
■ 인천이 만들고, 부평이 보고하다

1944년 8월 진수된 잠항수송정 4척이 조선기계제작소 독에 방치된 모습을 1950년 9월 인천상륙작전 이후 유엔한국재건단에서 조선기계제작소를 방문 시설 점검 과정에서 촬영한 사진. 조선기계제작소에서 만들어진 잠항 수송정은 한국전쟁 이후까지도 방치된 것으로 보인다. (UNRMS, S-0526-0354-0003-00042) /모씨네 디지털아카이브 제공
첫 잠수정 진수 이후 조선기계제작소는 히로시마의 일본제강소와 함께 육군의 명령으로 3식잠항수송정 건조를 맡아 1944년 8월 진수했다. 이때 함께 전달된 화물 적재 설명서에는 병기와 탄약을 어떻게 싣고 얼마나 실을 수 있는지가 수량 단위로 기재되어 있었다. 조선기계제작소가 제작한 3식잠항수송정은 함수 쪽에 전방 부력 탱크와 무선실, 병사실, 전지(電池)실을 갖추고 있었고, 중앙부에는 보정 탱크와 사령탑이 있었다. 하단에는 갑판 등이 배치되었다.
1945년 1월1일 인천조병창은 1944년 12월에 잠항수송정 2척을 진수했다고 상부에 보고한다. 잠수정을 만든 곳은 화수동이고, 보고한 곳은 부평이다. 인천조병창이 담장 안 소총 공장에 머무르지 않고 인천 지역 민간 군수공장의 생산까지 자기 실적표에 올리는 관리·감독 기구였음을 보여 주는 대목이다. 1943년 12월에는 조선기계제작소에서 인천조병창으로 넘어오는 노동자들을 인수하기 위해 직원이 부평에 닷새 동안 머물렀다. 그만큼 인천조병창은 군수공장의 인력 관리까지 담당했으며, 1944년부터 종전 직전까지 조선인 강제동원에도 깊숙이 개입했다.
미국과 영국의 정보기관은 조선기계제작소에서 건조된 신형 잠수정을 이미 알고 있었다. 1944년 4월 영국 정보국이 발행한 ‘극동 정보 요약’에는 “조선의 항공기 조립 공장 세 곳 가운데 하나로 부평을 꼽았으며, 그곳에 있던 것은 인천조병창의 탄약 공장이었다. 조병창은 조선기계제작소에서 잠수함 총 7척을 건조하고자 했다”라는 내용이 담겨 있다. 실제로는 전체 9척 가운데 4척만 건조된 상태였다.
잠수정 건조가 시작된 뒤인 1944년 8월, 시코쿠 북부 에히메현 미시마(三島)의 잠수수송교육대는 하야미 고이치(速見綱一) 대위와 대원 23명을 조선기계제작소에 파견했다. 1945년 1월 인천에 파견된 대원들은 조선기계제작소에서 2척(일련번호 3002와 3004호)을 수령한 뒤 우지나(宇品)를 거쳐 잠수수송교육대로 귀환했다.
이렇게 인천조병창과 조선기계제작소의 프로젝트는 해방과 함께 끝을 맺는다. 그러나 인천조병창은 미군의 점령 전후에 큰 격변을 예고하고 있었다.

1945년 9월8일 미 제7함대 제72기동부대 소속 앤티텀(USS Antietam)호에서 출격한 해군 전투기가 조선기계제작소 독에 정박해 있던 일본군 잠항수송정 4척을 촬영했다. /모씨네 디지털아카이브 제공
/전갑생 모씨네사회적협동조합 수석연구원
출처 : 경인일보 (원문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