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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에서 본 모씨네

미디어에 소개된 모씨네를 모아봅니다.
 

폭격 목표가 된 공장, 패전 앞두고 지하화 시도한 일제 [인천조병창 아카이브, 빈칸을 채우다·(3)]

 

 

경인일보·모씨네사회적협동조합 공동기획

 

규모·용도 알려지자 미군 중요 목표물 포함돼

1945년 2월 일본, 공장 분산 등 3개안 요구

생산관리 넘어 미쓰비시 군수 공장까지 떠맡아

감독 강화·일원화… 부평·인천항 공장 통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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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미 5공군 B-29 폭격기가 평양병기창 본부 일대를 폭격한 직후 촬영된 사진. (RG 342, P 29, Box 70, 1950. 8. 28, 미국 NARA). /모씨네 디지털아카이브 제공

 

 

국내 처음 공개하는 항공사진( 1 )은 1950년 8월27일 미 5공군 3폭격단 소속 B-29 폭격기가 평양병기창을 폭격한 직후 촬영한 것이다. 하지만 평양병기창은 폭격 이전인 7월3일 선천 군자리 광산 갱도에 주요한 기계들을 이전시켜 소련제 기관단총과 박격포 등을 생산하고 있었다. 이 광산은 지하 병기공장으로 바뀌었고 종업원만 8천명이 근무하고 있었다.

 

애초 평양병기창은 아시아·태평양전쟁기 평양병기보급창이었고 병기, 탄약, 전차, 자동차 등을 생산했다. 탄약을 제조·저장하는 전약소(塡藥所·탄두 충전 공장)도 있었다. 이곳은 부평(현 일신동·1943년 4월15일 설립)·겸이포·안양·영동 분창과 제주도 수리반, 부산 현장사무소 등을 관할하고 있었다. 반대로 부평 인천육군조병창은 평양병기창 내에 제1제조소 평양제조소를 두었다. 이처럼 이곳은 인천조병창과 분리해 생각할 수 없는 하나의 조직체이며 건물 구조나 배치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평양병기창이나 인천조병창이 일제강점기부터 지하화되었다면 전쟁 때 큰 피해를 피하지 않았을까. 폐허가 된 평양병기창을 주목하는 이유는 인천조병창의 지하화와 관련성이 있다. 일본군은 조선뿐 아니라 도쿄 등의 조병창들을 지하화 또는 이전을 검토했다. 이처럼 신생 인천조병창이 어떤 정책과 결정에 따라 지하화되는지 새로운 자료들을 통해 짚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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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폭격 목표물에 오르다

 

인천조병창은 1941년 11월 22일 개창 이후 화포와 소총 수리용 부품을 다른 조병창으로부터 넘겨받아 수리·정비 기능까지 갖추고 있었다. 그리고 인천조병창의 규모나 용도가 알려지자, 1943년 3월 23일 미 육군항공대는 별도의 표적 자료에서 정밀한 공작기계와 신무기 연구, 실험실까지 갖춘 고쿠라, 오사카, 나고야, 도쿄 조병창과 함께 인천·평양 조병창을 중요한 폭격 목표물에 포함시켰다. 1945년 8월18일 미 전쟁부의 정보참모부(G-2)는 “조선에서의 정보목표물”이라는 문서에서 인천육군조병창과 평양육군조병창을 나란히 실었다.

 

조병창이 표적이라는 사실은 일본군도 알고 있었다. 표적이 된다는 것은 두 가지를 뜻한다. 첫째는 언제 공격을 받을지 모른다는 것이고, 둘째는 큰 피해를 입어 대체할 곳이 마땅치 않다는 것이다. 조병창은 기계 한 대를 신규로 설치하는데 시간이 걸리는 시설이었다. 기계가 대한해협을 건너오는 것은 위험 부담이 컸다. 이렇게 전세가 악화되자 일본군은 미군의 공중 폭격을 피해 일부 기계를 조선으로 이전하려고 했다.

 

 

■ 미군 폭격 대비, 분산과 이전

 

1945년 2월15일 일본육군병기행정본부는 공습 같은 최악의 조건에서도 생산을 확보해야 한다며 세 가지를 요구했다. 공장을 분산할 것, 민간 공장을 쓰는 방식을 바꿀 것, 그리고 각종 방위시설을 강화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1943년부터 각 조병창이 방위시설을 손봐 왔지만, 미군의 폭격 위협과 조선에서의 ‘결전’이라는 극단적인 전쟁 계획이 인천 사람들에게까지 미치고 있었다. 이들의 계획은 사람보다 기계와 무기 생산에 맞춰져 “고도의 분산”, 중요 기계와 동력원의 “방호 강화”, 그리고 “지하시설”이 강조되었다. 육군병기행정본부가 요구한 것은 간소화와 ‘안전한’ 지하공장이었다. 민간 공장을 쓰는 방식을 바꾼다는 것은 쉽지 않았다. 조병창은 자기 울타리 안의 생산만 관리하다가, 부평 내 미쓰비시를 비롯한 군수 공장에 무엇을 맡기고 그 설비를 어디로 이전해야 할지를 계획해야 했다.

 

“지하 이전에 좋은 기회를 살펴서 순차적으로, 단번에 실시할 수 있도록 배려하라. 민간 공장의 소개 계획을 다룰 때에도 같은 취지에 따라, 사전 준비 지도에 빈틈이 없게 하라.”

 

인천조병창 와케 창장은 상부에서 내려온 지시를 그대로 따르고 있었다.

 

 

1945년 3월 고사포부대 등 주변 군사영역 확대

日, 지하 만든 경험 적어… 여건 맞춰 진행 지시

일본 위험·기계 부족… 제1조병창 부평 이전

하나의 조직체 평양병기창 미군 공격에 폐허로

 

■ 인천조병창, 부평과 인천 군수공장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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④ 1944년 11월 부평 약도.(RG 319, NM3 85A, Box 1009, 미국 NARA). /모씨네 디지털아카이브 제공

 

국내 처음 공개하는 부평 약도( 4 )는 1944년 11월 영국 6군사정보국(MI6)에서 작성한 것이다. 약도 작성 이후 1945년 4월21일 중국·인도·버마 전구 합동정보수집국(JICA)은 영국으로부터 부평 지역 약도를 받았다. 약도에 있는 히로나카 자동차 공장(기관차·화차 생산 및 수리), 도요타 화물자동차 공장, 히타치 전기기기 공장, 스미토모 전선 공장, 미쓰비시 항공기 공장 등이 인천조병창 관할에 있다고 보았다. 이처럼 영국은 해방 직후에도 부평 인천조병창에 관심을 보이는 미군과 함께 군수 조사 업무를 수행한다. 이처럼 인천조병창 인근에 군수 공장이 대거 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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③ 1945년 3월1일 인천조병창 창장 와케가 예하 부대장회의에 제출한 상황보고문서.(中央-軍事行政-兵器-41, 일본 방위성 방위연구소). /모씨네 디지털아카이브 제공

 

일본 본토와 오키나와 등지에서 민간인 피해가 늘어나는데도 항복하지 않은 일본 군부는 조선의 신생 인천조병창과 본토에서 진출한 대기업 군수공장까지 전쟁에 총동원시켰다. 그뿐 아니라 책상에 앉아 공부해야 할 학생들도 군수품 생산과 조병창 이전 공사에서 강제 노동에 시달리고 있었다.

 

와케 창장은 민간 공장의 감독 업무를 강화하고 그 활용을 조병창으로 일원화했다. 조병창은 감독 강화 차원에서 부평과 대전에 감독반을 설치하거나 복무규정까지 개정해 병기 정비를 강력하게 추진하겠다고 나섰다. 그리고 부평과 인천항 일대 군수 공장은 순차적으로 조병창 통제 아래에 들어갔다. 조병창은 1945년 3월부터 부평 내 군수 공장을 감독 공장으로 지정했다. 조병창은 미쓰비시제강 인천제작소(구 히로나카상공 부평공장), 히타치제작소 인천공장, 조선기계제작소, 디젤자동차 조선제조소, 조선 알루미늄 공장을 비롯해 시바우라전기 인천공장, 조선리켄금속 인천공장, 미쓰비시 광업, 조선제철 외에도 송도 고사포부대와 영종도를 비롯한 주변 도서도 관할구역에 두고 군사 영역까지 확대했다.

 

■ 인천조병창, 경험 없는 땅파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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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 인천육군조병창과 미쓰비시제강 및 줄사택 일대 항공사진(RG 373, 1946. 11. 14, 미국 NARA). /모씨네 디지털아카이브 제공

 

대규모 공장을 지하에 설치한다는 계획에서 누구도 경험자가 없었다. 본토에서도 지하시설을 만들어 본 사례가 극히 적어 실행이 매우 곤란했다. 조선은 더 말할 것이 없었다.

 

지하 공장을 지으라는 방침과 지하 공장을 지어 본 적이 없다는 사정이 인천조병창 부대장 회의 보고 문서 안에 나란히 들어 있었던 셈이다. 본부가 ‘기회를 간파하라’는 식으로 말한 것도 이 사정과 무관하지 않다. 일률적으로 언제까지 무엇을 끝내라고 못 박지 못하고, 여건이 되는 곳부터 하라고 한 것이다. 그러니 각 조병창이 내놓은 답은 저마다 달랐다.

 

도쿄 제2조병창 우지제조소는 폭약 설비 일부를 기존 민간 공장으로 빠르게 분산하고, 소형 발사약을 포함한 일부는 오카야마현 야나하라로 옮기기로 했다. 옮긴 설비는 지하로 넣는다는 단서가 붙었다. 사가미 조병창은 15m짜리 터널을 광범위하게 파고 있었다. 이것을 차례로 넓혀 지하 공장으로 만들 계획이었고, 조병창 밖으로 내보내는 소개와 지하 공장 건설은 따로 계획을 세워 이미 착수한 상태였다.

 

나고야 조병창은 숫자를 못 박았다. 주요 생산설비 가운데 옮길 수 있는 것의 30%를 조속히 지하로 옮긴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6곳의 측량과 토지 매수에 들어갔다. 오사카 조병창은 병원과 의료 시설을 분산하고 지하 수술실을 갖추기로 했다. 기계만이 아니라 사람을 치료할 자리까지 땅속으로 내려보내는 구상이었다.

 

4개 조병창의 답을 나란히 놓으면 방식이 갈린다. 도쿄 제2는 민간공장으로 내보내는 쪽, 사가미는 이미 파 놓은 굴을 넓히는 쪽, 나고야는 비율과 부지를 정해 새로 파는 쪽, 오사카는 사람을 지키는 쪽이다.

 

지하화와 짝을 이루는 것이 기존 설비의 재배치였다. 육군병기행정본부 조병부장은 그 이유를 설명한다. 신설 조병창은 기계공장에서 일부 기계를 받지 못해 라인을 돌리지 못했고, 다른 조병창은 필요한 종류의 기계를 구하지 못해 나머지 기계가 놀고 있었다. 지하화는 굴만 파는 일이 아니었다. 어느 조병창의 기계를 어느 조병창으로 보낼지 다시 짜는 일이 함께 돌아갔다. 어느 창이 무엇을 만들지, 남는 기계를 어디로 돌릴지가 이 시기에 다시 정해졌다.

 

도쿄 제1조병창의 실탄 설비가 부평으로 넘어오게 되는 것도 이때다. 본토가 위험해졌으니 바다 건너로 빼낸다는 판단과, 신설 조병창이라 기계가 모자란다는 사정이 한자리에서 만난 셈이다. 지상의 공장이 무너질 때 갱도로 들어간 설비는 살아남는다는 계산은 같았다. 1945년 3월부터 부평에서 그려지다 만 그림이 무엇을 노렸을까. 부평에서는 어떤 그림을 그렸을까.

 

 

/전갑생 모씨네사회적협동조합 수석연구원

 

출처 : 경인일보 (원문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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